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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정신 분석 심리학

오스트리아의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신경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다. 인간의 행동을 의식과 반대 개념의 무의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과 같은 결에서 개념을 설명한 것으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개념을 하나씩 자세히 보자. 먼저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가 만든 개념. 그리고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발견이라는 것이며 이는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1890년대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식분석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중적인 학자로는 융, 아들러가 있다. 융은 분석 심리학을 창시하였으며 아들러는 개인 심리학을 창시하였다. 정신분석학에도 한계는 있어서, 과학적 정확성이 부족하다거나 실제적인 경험 증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론이 이루어진 것들을 증거를 인정하지 못한 점으로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 오기도 하였다. 근데 현대에서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박들과 지적조차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알려짐에 따라 이러한 종류의 지적은 거의 수그러들었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나와 주변에 대해 자각이 없는 상태,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 상태의 두뇌 활동'을 말한다. 이때의 사고 과정은 기억, 동기 등 없이 저절로 발생하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개념을 대중화 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발현되는 것이 꿈이나 나도 모르게 하는 말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정신분석학과 차를 융이 말한 분석심리학에서 무의식은 마음속에서 의식하지 않고 있는 영역이다. 
프로이트는 체코에서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로이트의 부모는 일찍이 프로이트의 명석함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달 시켜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글재주도 뛰어나 주목받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뛰어난 프로이트는 빈 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하였고,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의 의대 재학 기간에 있던 특징으로는, 19세기의 위대한 생리학자로 유명한 브뤼헤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는 하나의 역동적 체계'라는 브뤼헤의 당시 급진적이던 견해에 매료되었다. 또 '에너지는 변형될 수 있어도 파괴될 수 없으며 에너지 체계의 한 부분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부분에 나타난다.' 라는 헬름홀츠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도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급진적 역학의 법칙들을 심리학에 적용하는 천재적인 이론을 창안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는 학문적 관심이 많았고 이를 연구한 것이 의학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물리학, 생물학, 철학, 동물학 등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몰두하였다. 프로이트는 프랑스 파리에서 최면술 연구로 유명한 샤르코를 만나게 되기도 하는데, 이때 프랑스에서는 몽유병, 다중인격, 히스테리 등과 같은 증상의 치료법으로 최면술을 이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활용하였을 때 최면술에 의한 히스테리 치료에는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샤르코의 급진적인 다양한 임상실험에 흥미를 느꼈고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신경학자에서 정신병리학자로 업그레이드 되게 되었다.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보러 이 어로부터 환자가 자신의 증세를 '말하는 것' 자체가 히스테리 치료법에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정화법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는 보고 이어와 함께 정화법 치료 사례를 엮은 저서를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출간 이후에는 이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결국 결별하였다. 프로이트는 최면, 정화법과는 또 다른 '자유연상법'을 개발하여 임상실험을 하였다. 
프로이트는 베르나 이수와 결혼하여 다섯의 딸 두게 되는데, 그 중 안나 프로이트는 훗날 유명한 아동 정신분석가가 된다. 프로이트는 생부와의 관계가 복잡하였고 이 이후에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 죄의식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프로이트는 성격 발달의 역동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프로이트 자기분석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정신분석을 구축하는 태동이 되었다. 이 시기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에 집중하여 환자에게서 자료들을 얻었다. 사람들이 꾸는 꿈을 분석해 보면,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고 자신의 내면 역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정신 분석의 개념을 발전시켜 나가다 1900년에 유명한 업적인 '꿈의 해석'을 출간하였다. 꿈의 해석이 출판되자 프로이트는 정신병리학회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도 잠시, 일반 대중들과 이어 의료계의 관심까지 받게 되었다. 2년 후에는 젊은 의사들에게 정기적인 연구 모임이 생겨났다. 후에 이 모임은 빈 정신분석 연구회로 발전하였다. 프로이트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미국의 클라크대학교 총장의 초청을 받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이때 프로이트는 추종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함께 연구하던 아들러, 보고 이어, 융 등의 동료들은 프로이트가 인간 행동의 동기를 분석할 때 성적 충동을 주장하는 것과 반대되는 입장으로 자신들만의 학파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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